1. 그들의 관계



"나랑 세모, 사귀기로 했어."

두리는 하나의 말에 별 미동이 없었다.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말을 꺼내는 하나를 바라보았다. 하나는 그런 두리의 반응에 재미 없다는 듯이 휴대폰을 바라봤다. 세모에게서 온 쪼꼬톡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저울질 하더니 결국 권세모냐?"

쪼꼬, 쪼꼬, 쪼꼬톡.

"그게 무슨말이야."

두리의 말과 함께 울려퍼진 쪼꼬톡 알림음에 하나가 다시 물었다. 그런 모습에 두리는 한숨을 쉬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금 들어온 하나는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두리는 그런 하나에게 다가가 셔츠깃을 완전 풀어헤쳤다.

"차두리, 이게 무슨짓이야!"

갑작스런 두리의 행동에 하나는 얼굴이 시뻘게진채로 소리쳤다. 바로 앞에서 소리 치는게 시끄럽지도 않은지 얼굴의 표정 변화 없이 목선에서 가슴부근까지 훑어본 두리는 무덤덤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벌써 했네."

그게 무슨 뜻인지 단숨에 파악한 하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게졌다. 도운이 자고 있기 때문에 큰 소리를 내면 깰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하나는 조용히 숨죽여 말했다.

"사귀는 사이, 그것도 성인인데 못할 이유가 뭐니?"
"그래, 그렇겠지. 좋았냐? 니가 깔리는거지?"
"뭐? 넌 말을 해도-"
"네 말처럼 성인인데 이런말도 못해?"

억양없이 단조로운 말투. 평소와는 다른 두리의 모습에 당황한건 하나였다. 자신이 짜증을 내어도 항상 웃으며 맞받아치던 두리가 오늘따라 조용했고 진지했으며 침착했다.

하나는 그런 두리를 애써 모른척하며 옷을 여몄다. 그의 흔적을 다른이, 그것도 쌍둥이 동생에게 보여주는 것은 부끄러웠다.

두리는 그런 하나를 보다가 자켓을 집어들고 방을 나섰다. 뒤에서 하나가 어디가냐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물어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라 가죽자켓을 입은 두리는 차고로 가려다가 이내 발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10년을 넘게 자신과 함께한 Y의 인공지능은 무서울정도로 두리를 잘 꿰차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직 12시가 되지 않은 대도시는 여전히 많은 네온사인이 번쩍거렸고,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그는 시선을 돌려 화려한 불빛과는 떨어진 거리로 걸어갔다. 대도시 중에서도 인적이 드문 공간, 황량하게 세워져 있는 오공폐차장이 보였다. 두리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불빛 하나 없는 곳, 두리는 담을 타고 넘어가 급하게 한 사람을 찾았다.

타이어가 쌓여 있는 곳 위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오공이 있었다. 두리는 그 모습에 발걸음을 빨리하여 그에게 다가갔다. 탁탁, 뛰는 소리가 남에도 오공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여기서 뭐해."

오공은 대답이 없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오공의 시선 끝에는 안개가 끼어있는 하늘에 유독 반짝이는 별 하나가 있었다.

"독고오공."

두번의 부름. 그럼에도 오공은 대답이 없다. 그는 마치 넋이 나간것처럼 멍하니 앉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두리는 그를 보다가 이내 바닥에 널부러진 휴대폰을 주었다. 화면을 켜자 쪼꼬톡이 보였다. 발신자는 권세모였다.

[나 이제 그 애랑 사귀기로 함^^ 조언 고맙다. 나중에 밥 한끼 살게.]
[사실 하나랑 사귀기로 했어. 너한테 제일 먼저 말고 싶더라. 축하해줘.]

그가 쪼꼬톡을 보낸 시간은 20시 정도 였다. 독고오공 성격에 저 메시지를 보자마자 저상태로 계속 있었을게 뻔했다. 두리는 휴대폰 화면을 끄고 제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아직도 멍하게 있는 오공을 깨울 방법. 충격 요법에 남의 사생활이지만, 저대로 가다간 그대로 석상이 될 것만 같았다.

"차하나랑 권세모, 어디까지 갔는줄 아냐?"
"......"
"걔 몸에 자국 많이 남겼더라."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마음 아팠다. 자국이 남겨지는 과정들. 따로 말해주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 충분히 아는 나이였다.

오공의 고개가 서서히 돌려졌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탁한 눈동자에 서서히 눈물이 맺혀 방울방울 떨어졌다. 두리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방울씩 떨어지던 눈물은 금세 가득 차올라 폭포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내 조금씩 흐느끼는 소리가 커지고, 그는 한참을 울었다. 두리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오공이 지쳐 울음이 그칠 때 즈음, 두리는 오공의 앞에 섰다.

"정말 웃기지. 연애 상담을 도와주던 친구가 짝사랑 하던 애랑 사귀고, 자고."
"두리야...."

드디어 오공의 입이 열렸다.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목소리는 이미 모두 갈라져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공은 아직도 눈물을 모두 쏟아내지 않았는지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며 천천히 말했다.

"난 세모가 좋아하는 애가, 하나인줄 몰랐어."
"그랬겠지. 넌 차하나 말고는 관심 없었으니까. 다 아는걸 너만 몰랐네."

빈정거리며, 매몰차게 말하는 두리의 말에 오공은 몸을 떨었다. 몇시간을 밖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왜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어? 너라면, 제일 먼저 나에게 말해줄 주 알았어."
"네 친구가 네가 좋아하는 아이를 좋아하고 있어. 이걸 퍽이나 잘 말해주겠다."

두리의 말에 오공은 슬프게 웃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떴다. 그것을 몇번 반복한 오공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제일 친한 친구의 쌍둥이 형을 좋아했다. 그는 제 다른 친구와 사귄다. 그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편으로는 미안했었다.

오공은 슥슥 제 눈물을 닦았다. 어느새 안개와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하나 보이던 별까지 가리어졌다. 오공은 시간이 너무 늦었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차하나와 똑같은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걱정 시켜서 미안해, 두리야."
"더 할 말 없어?"
"...조심히 들어가."

오공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는 표정을 만들어내었다. 눈이 울고 있어 그 모습은 괴기하기 짝이 없었으나 두리는 여의치 않고 오공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쌓아놓고, 그렇게 찔끔 울어서 속이 풀리겠냐? 따라와. 한잔 하자."


***


강이 한눈에 보이는 대도다리 근처에는 포장마차가 여럿있었다. 두리는 그중에서도 사람이 많은 곳을 들어갔다. 오공은 머뭇거리며 두리를 따라 들어갔고 남아있는 자리에 앉았다.

"여기 소주 한병하고 어묵탕이요."

간단하게 주문을 한 두리. 주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네~' 라고 대답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이전에도 주문이 많이 밀려있었는지 큰소리로 지휘하기 시작했다.

간편한 메뉴라 빨리 나온 편인 어묵탕은 맛이 좋았다. 칼칼한 국물에 절로 소주가 생각나서 두리는 병을 탁 친다음 뚜껑을 열었다. 약간 난 기포는 따르자 금세 사라졌다. 잔에 술을 채워 오공에게 건내고 제 잔에도 한 잔 따랐다. 아무런 의미없이 잔을 부딪히고 한꺼번에 넘겼다. 목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다시 어묵탕을 들이켰다.

"크으..."

예전부터 술이 약했던 오공은 한 잔을 쭉 들이키고 쓴소리를 냈다. 마신지 몇초나 되었다고 벌써 얼굴이 새깔개진 오공은 잔을 내려놓고 어묵을 간장에 찍어먹었다. 짭잘함과 감칠맛이 좋았다.

한동안 서로 잔을 주고 받은 둘의 침묵은 오공이 먼저 깨뜨렸다.

"나 정말 바보같지."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두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오공이 실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정말 바보같아, 두리야. 목에 가래가 섞인 오공의 목소리는 무언가를 긁는듯한 목소리였다. 가래뱉어. 건네준 휴지를 바라보던 오공은 이내 기침을 하더니 침을 뱉어냈다. 고마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여전히 무언가 걸린듯했다.

두리는 마음에 안든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걔가 뭐라고 이렇게 펑펑 우는거냐? 사귀는 것도 아니었잖아."

그 말에 오공이 다시 흐느꼈다. 아, 정말 싫다 독고오공. 두리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소주 한 병을 추가주문 해서 오공의 잔에 따랐다. 그걸 또 원샷하는 오공.

"속버린다. 안주도 먹어."

먹기좋게 가위로 자른 어묵을 그의 접시에 담아주었다. 오공은 훌쩍이며 접시째 들이켰다. 목에 걸려 켁켁 거리는 그에게 물잔을 건냈다.

"차하나가 그렇게 좋냐."
"........"

오공은 대답이 없었지만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말 가지가지한다. 그 말을 들은 오공은 더욱 침울해져 술잔만 기울였다.

"니가 먼저 좋아한다고 말하지 그랬어."

타박하는듯한 그의 말에 오공의 고개가 숙여진다. 나도 그러고 싶었어. 모기만한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소음에 쉽게 감춰진다.
두리는 눈을 감듯 낮게 내리깔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하나는 동성애자가 싫다고 하더라..."

난 그게 정말인줄 알았어. 친구로만 남아도 좋으니까. 바라만 봐도 좋으니까... 물론 그 애가 그 말을 했을땐 너무 슬펐어. 많이 울었었는데, 지금은 그냥-

"죽고싶다."
"말 함부로 하지마라."

오공의 말에 두리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무섭잖아, 죽는건. 오공이 입을 오물거렸다. 사실 그것도 생각해봤는데, 하나를 못보는게 더 무서워.

"미치겠다. 너 왜이렇게 찌질해졌냐?"
"몰라.... 그런데 두리야, 더 찌질한게 뭔줄 알아?"

두리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오공의 말을 들어주었다.

두리야, 상 탔을때 웃어주며 축하해준 그 아이를 기억해.
두리야, 아빠랑 싸워서 집나온 나를 위로해주던 그 아이를 기억해.
두리야, 화단에서 물을 주며 꽃을 키우며 웃던 그 아이를 기억해.
두리야, 차하나라는 이름을 가진 그 아이를 기억해.

"아직도 하나가, 너무 좋아...!"

왼쪽 가슴을 두드리며 울먹거린다. 도대체 얼마나 울어야 눈물을 안보이는 걸까. 몇시간째 우는거야. 쟤도 참 대단하다. 두리는 그런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제 가슴을 치고 있는 오공의 손을 잡았다.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두리를 바라보았다.

"차하나가 그렇게 좋냐."

아까와 같은 질문.

"너무 좋아해. 말로 다하지 못할 만큼 사랑하고 있어."

아까와는 다른 대답.

다시 한 번 빈 잔에 술을 따라 마신다. 두리는 잠시 전화좀 하고 온다며 술을 마시는 오공을 뒤로하고 포장마차 밖으로 나왔다. 싸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지만 딱히 춥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운느낌에 입고 있던 재킷도 벗어 팔에 걸었다.

띡띡. 단조로운 버튼 소리가 들리고 이내 누군가와 연결 됐다. 저와 비슷하지만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 하나였다.

-"차두리. 너 안들어와?"
"나 오늘 밖에서 자고 내일 들어갈거야. 아버지한테 말해줘."
-"뭐? 지금 새벽 두시야 차두리. 도대체 뭐하는데?"

핀잔을 주는 목소리지만 그 안에서 마치 안도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두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아직도 오공은 안에서 소주를 홀짝이고 있겠지. 두리는 잠시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오공이 만나고 있어. 좋아하던 애한테 차였대."
-"아, 그래? 그럼 뭐... 그래도 되도록이면 아침엔 들어와."

그 말을 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오공을 걱정하는 듯한 투였지만 20여년을 같이 살아온 두리는 그 안에 내포된 뜻을 알았다. 하필 자신이 커플이 된 날에 차이다니, 재수도 없군. 분명 이렇게 생각할것이었다.

휘이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었다. 두리는 몸을 떨며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 그 무리에 섞여 혼자 술을 따르는 오공은 작아보였다.

"야, 그만 마시고 가자."
"아직 이만큼이나 남았어..."

오공은 그리 말하며 4분의 1즈음 남아있는 소주병을 눈앞에서 흔들었다. 찰랑찰랑, 맑은 소리와 함께 오공의 몸도 흔들린다. 두리는 그의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단숨애 들이켰다. 식도가 타들어가는 느낌에 인상을 쓰고 곧바로물을 들이켰다.

"...두리야?"
"다 마셨어. 이제 가. 너 너무 취했어. 데려다 줄게."
"아직, 더... 윽."
"하, 야. 힘들게 하지말고 걍 기대. 여기 계산이요."

빠르게 계산을 하고 오공을 엎듯이 기대게 하고 택시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공폐차장앞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왔다. 온달이는 졸업여행이라고 했고. 오공이네 아버지는 주무시려나.

"야 독고. 아버지는?"
"....거제도에 잠시 내려가 계셔..."

오공이 땅에 산채 비틀거렸다. 그가 넘어질까싶어 빠르게 그를 잡아 제대로 서개 했다. 오공은 잠시 비틀거리더니 이내 똑바로 섰다. 쌀쌀한 바람에 술기운이 달아나는 듯 했다. 그와 동시에 제가 했던 일들이 생각나서 도저히 같이 있기 힘들었다.

"고, 고마워 두리야... 내가 다음에, 밥이라도 한 번-"
"독고오공."
"어...?"

두리가 오공의 양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눈을 마주쳤다. 오공이 멍청한 소리를 내자 두리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왜그래, 두리야? 약간 벌게진 얼굴로 제게 물어보는 오공의 얼굴은 퍽이나 색스러웠다.

"차하나를 바라만봐도 좋다며. 그러니까 그냥 바라만 봐. 이제 넌 안돼. 권세모한테, 차하나한테 말할 수 있어?"
"-난...."
"못하겠지. 좋아하는 사람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하는건. 너무 미화했나? 그걸 말함으로서 네게서 더 멀어질 차하나가 무서운거겠지. 그러면 이제 바라보지도 못할테니까."

푹푹. 두리의 말이 비수처럼 날카롭게 심장에 찔린 것 같았다. 그것이 옥죄여와 숨이 다 가파왔다. 오공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시선을 바닥으로 두었다. 제 속을 꿰뚫어보는 두리를 바라 볼 자신이 없었다. 두리는 그런 오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를 보는 것 만으로도 좋다며, 오공아."

두리의 목소리가 한껏 부드러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압박을 주는듯한 느낌. 두리는 바닥을 뚫어지게 보고있는 오공의 얼굴을 붙잡아 올려 저와 눈을 마주쳤다. 깊은 검은색 눈동자에 얼굴이 비췄다.

"나는 어때?"

두리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것과 상반되게 오공의 얼굴이 이상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눈을 피하려 두리를 밀쳐내려 했지만 알코올 때문에 몸이 제대로 가누어지지 못해 그것도 하지 못했다.

"헤어만 다르고, 얼굴은 똑같잖아? 뭣하면, 머리라도 기를까?"
"아냐. 이건 아니야, 두리야."
"왜? 넌 어차피 차하나 못잊지 않아? 내가 걔 역할 대신 해주겠다고. 나랑 차하나 21년동안 같이 살았어. 흉내 내는거 어렵지 않아."
"...두리야..."

제 이름만 계속 부르제끼는 오공에, 두리는 인상을 썼다. 오공의 탁한 눈에는 눈물과, 애환과, 절망, 기대가 품어져있었다. 어쩔래, 독고오공? 어차피 선택지는 하나야. 넌 그걸 고를거고.

"나에겐, 하나뿐이야. 하나 말고 다른 사람을 둘 여유가 없어."
"너 정말 바보같다, 오공아."

조금 더 높아진 두리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마치 하나와 같아 오공이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본 두리의 입가가 올라가고 눈가가 접어진다. 하나의 표정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은 것 같은 얼굴에, 오공은 저도 모르개 마른침을 삼켰다.

이마의 절반을 덮은 짧은 앞머리와 깔끔하게 정리한 눈썹,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는 저절로 차하나를 떠오르게 했다. 그 모습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볼에 닿는 약간 까슬한 감촉에 다시 눈을 떴다. 두리의 목이 보였다. 약간 짠 땀냄새가 났다.

"...차두리 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독고오공. 한번 사겨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냥 깨지면 되잖아? 우린 더이상 애가 아냐. 누군가의 시선을, 참견을 받을 필요도 없어."
"이건, 아니야. 두리야. 집에가서. 더 잘 생각해봐"

두리는 아무 말 없이 오공으늘 노려보듯하였다. 그 살벌한 기세에 오공은 주눅이 들었지만 그래도 당당히 어깨를 폈다. 달빛을 받아 서슬하게 빛난 두리의 눈은 금새 바뀌었다. 초승달같이 눈을 휘며 접어 웃은 두리는 오공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고 힘을 꽉 주어 목덜미애 얼굴을 묻어 혈관을 살짝 깨물었다.

"윽, 이게 무슨짓이야!"
"......"
"정신차려 차두...리...! 윽, 하지마!"

발버둥을 쳐보려하도 이미 술에 절은 몸이 움직이는걸 거부했다. 떠한 계속되는 자극에 오공의 머리는 약간 하얘졌다. 그러다가 또 디잉- 머리가 울리고 이상한 느낌이 든다. 티 목 부분을 아래로내려 쇄골까지 깨문다.

"하윽... 잠시, 잠시만."

오공이 애원하듯이 빌자 두리는 그제서야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천천히 오공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 안에 담긴 욕망과 두려움은 두리의 것과 같아 그는 진득하게 웃었다.

"흥분되지 않아? 차하나랑 똑같은 얼굴로 이렇게 하니..."

오공은 손을 뒤로해 제 휴대폰을 찾았다. 없다. 항상 뒷주머니애 꽂고 다니는게, 지금은 없다. 다시보니 두리의 왼쪽 가슴주머니에 있었다. 휴대폰을 찾는 오공을 눈치 챈 두리는 휴대폰을 꺼내 흔들다가 뒤로 던져버렸다.

"오공아...."
"......"

눈을 아래로 뜨고, 손을 가지런히 한다. 아까보다 부드러워진 목소리는 분명 차하나의 것이었다.

"나랑 자자."

오공은 무언가에 홀린듯이 두리의 어깨를 잡아 끌어안았고, 이유모를 눈물을 흘렸다. 니가 왜울어 독고오공. 뭘 잘했다고 울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오공은 쉽사리 눈물을 훔칠 수 없었다. 제 욕심에 의해 친구를 잃는다. 그 친구는 제게 이성이라는 의미로 새롭게 다가와 손를 내민다.

오공은 그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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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mo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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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하늘, 그리고 너

거제도에서 고등학교 졸업까지 한 오공은 대학 문제 때문에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로서는 이미 초등학생 때 부터 해커 일을 하며 짭잘한 용돈을 벌었기 때문에 진로 또한 컴퓨터 계열을 나왔고 진학 또한 거제도에 있는 과학대학교를 다닐 생각이었다.

"대도시로 올라가라."
"아버지, 하지만..."

오공은 10년전보다 훨씬 늙어버린 아버지를 보았다. 거제도에서도 계속 폐차장 일을 하며 그럭저럭 잘 살았다. 하지만 그것도 거제에서의 이야기였다. 대도시는 땅값부터가 비쌌고 그와 마찬가지로 집값또한 비쌌다. 대학이야 장학금을 받으면 되지만, 거주지는 기숙사 학교가 아니거나 자신의 집이 없으면 열약한 환경에서 살아야한다.

컸었던 키도 이제는 점점 줄고 있고, 다부졌던 어깨가 초라해보였다. 오공은 이제 아버지보다 훌쩍 커버린 자신의 키를 보며 대도시에 가서 할 일을 생각해봤다.

"생활비는 걱정 마라. 내가 다 보내줄테니, 알바 할 생각헌들 말고 공부만 해."
"나 대학 안가도 돼요, 아버지. 지금도 오라는데 많아요."
"어허."

오공은 결국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하고 대도시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기로 했다. 온달이는 그럼 여기서 아버지랑 같이 있는건가. 온달이라도 아버지 옆에 있으면 그나마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이제 온달이도 고등학생이니까.

그나저나, 대도시라.

"10년 만이지."

오공은 특별했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기억해냈다. 좋지 않은 일로 엮였다가 더블유까지 받아 또봇의 파일럿을 했던 자신을. 잊으려고 해도 잘 잊혀지지 않는 기억 때문에 오공은 쓴 웃음을 지었다.

물론 더블유도 잘 있었다. 1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오공의 정비로 인해서 매우 깔끔하고 작동도 잘 되었다. 이제 면허도 있고, 직접 더블유를 운전 할 수 있지만 더블유는 하늘을 날아서 가는 것을 더 선호했다.

"더블유, 대도시에 갈거야."
"오, 그게 정말인가-"인가, 인가-

더블유는 자동차였지만 들뜬 것이 확 느껴졌다. 오공은 피식 웃으며 더블유의 아래로 가 정비를 마저했다. 낡은 나사를 빼 내고 새 나사를 끼워 넣은 오공은 이내 쾅쾅거리는 소리에 얼굴을 빼내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온달이다.

온달은 어릴적 아팠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컸다. 고등학생이 되는 시점에서 키가 180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온달은 '형!'하며 달려와 그의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렸다.

"형, 진짜 대도시에 갈꺼야? 나도 데려가면 안돼?"
"응, 대도시로 가게 됐어. 너까지 가면 누가 아버지를 보살펴주냐?"
"힝, 그래도..."

더블유의 아래에서 빠져나와 장갑을 벗고 온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금빛 실이 손에서 사르르 풀어진다.

"언제가는데? 언제? 언제?"
"일주일 뒤에 가기로 했어."
"왜 그렇게 빨리 가는거야."
"집 알아봐야지. 집 찾을때까지는 여관에서 머물거야."
"두리 형네에 전화해보면 안돼?"

아, 그러고 보니...
오공은 현재도 연락을 주고 받는 하나, 두리, 세모, 딩요를 떠올렸다. 화상으로만 보아서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달라지지 않은 얼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온달은 두리의 연락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고,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두리의 얼굴이 보였다.

"두리 형!"
-"오, 온달이~ 어쩐 일이야?"
"헤헤. 형아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
-"그런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나온다. 어? 오공! 오랜만~"
"안녕 두리야."
"있지있지 두리형. 형아가 대도시에서 학교 다니는데 숙소가 필요하대! 형네 집에서 자면 안돼?"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아냐, 두리야. 자취방 구해놨어."

물론 아직 구하지도 않았지만 오랜만에 연락한 이유가 거주 문제 때문이라면 자신이라도 꺼려질 것 같아서 서둘러 방을 구했다고 했다. 온달은 오공의 옆구리를 툭 찌르며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오공이 형 아직 방을 구하지 못했거든. 방 구할때까지만 조금 지내면 안될까? 응, 형?"
-"안될거야 없지. 집에 남는 방 있으니까. 아예 우리집에서 하숙하는건 어때?"
"아냐, 집에 너네만 있는것도 아니고 박사님께서도 있으실텐데, 많이 불편해 하실거야."

오공은 손사레를 쳤지만 두리는 잠시만 있어보라며 아주 크게 아빠를 불렀다. 얼떨결에 차박사가 하숙해도 된다는 허락을 해주었다. 온달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뿌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오공은 그저 불편했다. 마냥 어린이가 아니라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라 친구의 부모님께 기대는 건 아닌것 같았다.

-"야, 우리도 그냥 재워주는거 아니거든? 돈 내야하거든?"
"...그럼 한달만이라도 신세를 져도 될까?"
-"야 물론이지. 대도시에 언제올꺼야?"
"일주일 뒤에..."
-"알았어. 방 싹 치워놓을테니까 몸이랑 짐만 가져 오라고!"
"어, 고마워, 두리야..."
-"친구인데 이정도야 뭐. 일주일 뒤에 보자, 그럼."

통신이 끊어진 전화기를 들고 오공은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온달이 혀를 쯧 차며 더블유에게 기댔다.

"형, 이럴때가 아닐텐데... 짐은 다 싸놨어?"
"어? 어..."

짐이야 다 싸놨다.
온달은 아직까지도 어벙한 표정으로 짐을 더블유에게 실었다. 정말이지 멍청해진 기분이다.
오공은 온달과 함께 집에 들어가서 이미 정리해놓은 짐들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자 보이는 CD케이스에 미소를 지었다.

"어, 형 이건 뭐야?"
"이거 오랜만에 한번 볼까? 10년전에-"

10년 전 갑자기 거제도로 떠나야 했었을 때, 두리가 준 CD였다. 그 안에는 제 친구들과, 박사님들, 네옹과 혜라, 그리고 또봇들이 작별 노래를 불러주는, 지금 보아도 눈물이 날것만 같은 영상이었다.

"이거 두리형이 만든거였지?"
"응? 맞아. 어찌나 잊지 말라고 당부를 하던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한다. CD를 주면서 제가 기획했으니 꼭 간직하라는 간지러운 말. 물론 오공은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웃는 얼굴로 떠났지만 먹먹했던것은 사실이었다.

"두리형 보고싶다."

온달은 유난히도 두리를 잘 따랐다.
어렸을 때 부터 유난히 몸이 약했던 온달은 건강하고, 축구 또한 잘하는 두리를 매우 부러워했었고, 집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발을 헛딛어 넘어지는게 일상이었지만 집에서는 항상 두리형은, 두리형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그러고보니 온달이 넌 유독 두리를 잘 따랐었지."
"헤헤. 사실 형한테만 말하는건데,나 두리형 좋아해."
"...뭐라고?"

오공은 자신이 무언갈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한번 온달에게 재질문을 하였지만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두리형, 멋있잖아. 나도 두리형 같이 되고싶어."

온달이 말하는게 단순한 플라토닉 러브인지, 아니면 에로스 러브인지 헷갈렸다. 그렇다고 자신이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있는건 아니었다. 단지-

'뭐야, 기분이 이상해...'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기분이 더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조금 더 간질간질하고, 조금 더 그를 조여오는 느낌. 머릿속이 핑 돌아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온달은 그런 오공의 상태를 눈치 못채고 게임을 하러 간다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독고온달."

제 동생. 부모님이 바빠 항상 자신이 키우다시피 한 동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거란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오공은 온달에게 자신의 유년 시절을 투자했다.

"차두리."

첫만남이 어디였지? 아, 그래. 초등학교 하교때, 자신이 만든 가짜 또봇때문에 만났었지. 그땐 걔네가 진짜 또봇 파일럿일줄은 몰랐는데. 그러고보니, 디룩도 아크니의 부하였으니까 나도 한때는 아크니의 부하였었겠네.
두리 이메일에 바이러스를 퍼뜨려서 또봇을 조종하기도 했었지.
다시 생각해보니 감회가 새롭다.
뭐, 어떻게 오해를 풀게 되어서 친구가 되고, 더블유도 같이 있고, 모든게 잘됐는데. 괜찮다고 웃어주는 아이에게 마주 웃어주었는데-

왜 너만 부르면 가슴이 먹먹해질까. 10년이나 지났는데.

"보고싶어-"

보고싶어, 두리야.
무서워, 두리야.


***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 대도시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더블유와 둘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방학 동안 대도시에서 지내기로 한 온달도 짐가방을 들고 옆에서 해맑게 웃는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아빠, 2주 뒤에 봐요!"

온달은 해맑게 말하고는 더블유의 뒤에 탑승했다. 온달은 차를 직접 몰고 가려다가, 날아가는게 신호도 없어 더블유를 변신시켰고, 업그레이드된 더블유는 엄청난 속도로 대도시로 향하기 시작했다.

"다들 되게 오랜만에 보는거 같지 않아?"
"그러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얼굴을 대면한 것이 언제였지?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장소와 일시가 같아 만났었었다. 아주 잠시. 두리는 만나지 못했고 세모와 하나, 딩요를 만났었다.

"또봇들도 잘 있겠지?"
"물론이지."

몇차례나 업그레이드 된 더블유는 엄청난 속도로 날고 있었다. 한시간 반쯤 되었을까, 어느새 대도시의 표지판이 나왔고 온달은 그것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

"두리형! 우리 대도시야! 빨리빨리 마중나와줘~"
-"어, 벌써? 알겠어. -야, 미안미안. 오늘만 봐주라. 금방갈게, 온달아. 바로 우리집으로 오면 돼."

모임을 가지고 있던 중이었는지 두리는 사과의 말을 꺼내고는 통신을 끊었다. 오공은 두리의 스케줄을 깬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오니 망설임 없이 바로 온다는 말에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초등학생 시절때에 변두리로 이사를 갔던 차씨 가족과 권씨 가족들은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교육 문제로 다시 대도시에 거주했다.

두리가 보내준 좌표로 길을 찾은지 얼마 되지 않아 아래에서 익숙한 밀빛 머리가 보였다. 두리였다. 두리 뿐 아니라 도운 또한 있었다.

괜시리 민망해지는 기분에 오공은 헛기침을 했으나 들뜬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더블유가 지면에 닿고, 이내 자동차로 돌아와 차에서 내렸다.

"오공아! 온달아!"
"오랜만이야-"

두리의 인삿말에 오공은 기분이 좋아졌다.
유치할지는 모르겠지만 온달의 이름이 앞에 있었으면 만나자마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을 수도 있었기에 오공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리혀엉-!"
"억! 온달이, 너 많이 컸다? 이제 나보다 더 큰거같은데-?"
"헤헤. 형아, 보고싶었어."

유년 시절의 온달은 또래보다 작은 키였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무지막지하게 키가 커서 현재는 두리보다 1-2cm정도 더 큰 편에 속했다. 이제 고등학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 클 여지가 남아있었다.

두리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온달을 진정시키고는 원래 행해야 하는 순서를 알려주었다.

"나한테 이러지 말고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아, 맞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안녕하세요, 박사님."
"그래, 그래. 둘 다 오랜만이구나. 들어가자. 너네가 온다고 해서 맛있는것 자뜩 해놨단다."
"와, 박사님 최고!"

온달은 콧노래를 부르며 도운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공은 짐까지 내버려두고 들어가는 온달을 차마 다시 부를 수 없어서 양손에 짐을 들었다.

"하나는 내가 들게. 그리고 더블유한테 차고 문 열어놨으니까 거기 가 있으라고 해. 엑스랑 와이도 좋아하겠다."
"응, 알았어. 더블유, 뒤편으로 가면 엑스 와이가 있을거야."

더블유가 차고로 들어가고, 오공은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래, 두리의 말만 아니었으면.

"오랜만에 보는건데, 잠시 마당에서 이야기 좀 하다가 들어갈래?"
"-좋아."

무슨 말을 할 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로봇이 나타났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리는 아주 가까운데에서 나고 있었다.

쿵.쿵.쿵.쿵.

오공은 제 심장 부근을 부여잡았다. -어, 뭐지?
난생 처음 느껴보는 두근거림에 오공은 약간의 두려움이 일어났지만, 애써 담담하게 두리와 함께 마당쪽으로 향했다. 마당은 벤치가 있어 휴식공간으로 제격이었다.

"야, 앉자. 뭘 그렇게 서있어? 그나저나 되게 오랜만이다. 한 3년만인가? 하나는 고2때 너 본 적 있다고 하더라."
"응. 수학여행지가 같았으니까. 점호시간이라 오래 보지도 못했지."
"먼저 연락이라도 하지. 너는 내가 먼저 연락 안하면 잘 안하더라?"
"응? 아니, 난 너한테 방해가 될까봐-"

오공의 말에 두리가 시원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씨익 올라가는 양쪽 입고리가 둥그스럼해서 매우 유해보였다. 그는 의자 뒤에 편하게 기대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친구끼리 방해되는게 뭐가 있냐? 얼굴 까먹겠다. 뭐, 이제부턴 같이 살거니까 상관없나?"

친구끼리, 친구끼리.
그래. 친구지. 친구가 어디야. 어디서 이런 친구 얻는건 쉽지 않아 독고 오공. 정신 차려. 애초에 두리는 원래 친구잖아.

"그나저나 온달이 되게 많이 컸더라. 어, 너 키도 완전 많이 컸잖아? 이걸 왜 못봤지? 하아... 누군 축구를 열심히 하는데 아직 키가 180도 안되다니."
"너도 충분히 커."
"너만큼만 딱 컸으면 좋겠다. 나도 아직 성장판이 닫히진 않았겠지?"

운동을 하는 두리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키에 관해서도 민감했고 옆에 앉은 오공을 스캔하더니 한숨을 푹 쉬고는 오공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

두리에게는 별것 아닌 그냥 친구에게 기댄 행동이겠지만, 오공은 쿵쿵 거리는 소리가 두리에게로 전달될까봐 일부러 무겁다며 어깨를 떨쳐냈다. 두리는 오공의 어깨를 그대로 타고 내려와 무릎에 안착했고 곧 의자에 누웠다.

"야 오공아. 나 집에 2월까지만 집에 있고 3월부터는 나가서 살거든?"
"뭐? 왜?"
"아, 얼마전에 국대 상비군 뽑혔어. 올림픽 준비하려구."

그래, 두리는 축구선수가 꿈이었지.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때 축구단에 스카웃이 들어와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이야기는 딩요를 통해 전해들었다. 스포츠 뉴스에는 별로 관심없는 오공은 두리의 활약을 잘 몰랐지만 나름 팬카페도 있는 두리였다.

연한 갈색 눈동자가 하늘을 담는다. 시선이 내려와 제 얼굴을 비춘다. 눈밖에 마주치지 않았는데 무언가 화끈거려 자신도 하늘을 바라보았다. 참 맑았다.

"이거 너한테 제일 처음 말한거야. 사실 상비군 뽑혔다는거 얼마 전에 나도 알았거든. 네가 먼저 알아줬으면 좋겠어서."
"어? 두리야."
"그냥 그렇다고, 오공아."

두리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 놓았다. 오공은 잠시 손을 떨다가 이내 두리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짧은 스포츠 머리를 위로 올렸다. 운동을 하는 아이 치고는 참 말간 피부였다. 간간히 박혀 있는 주근깨는 공통점인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오공아."
"응, 두리야."

두리가 눈을 감은 채 오공의 이름을 불렀다. 언제나 그렇듯이 오공은 부드럽게 대답을 해준다.

"오공아."
"응, 두리야."
"독고오공."
"응, 두리-"
"내가 이렇게 까지 말했는데 모르겠냐?"

-두리야?
번쩍 떠진 눈 사이로 제 얼굴이 모두 비취었다. 약간의 홍조가 올라와 있는 피부는 겨울이기 때문에, 라고 변명을 할 수 있었다.

"나 너 좋아해."
"...응?"
"플라토닉 러브 말고, 에로스 러브. 넌 어떻게 생각해?"
"두리야, 난...."

흔들리는 눈동자, 머뭇거리는 말투.
두리는 그대로 씨익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농담이지.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밥먹으러 가자. 아빠가 엄청 맛있는거 해놨지롱~"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난스럽게 말하는 두리의 모습에 오공은 어이가 없었다. 그의 말에 설레고, 그리고 두리를 좋아한다고 공개까지 한 온달은 어쩐단 말인가. 그에게 대답을 주기에 지금 당장은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농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야, 차두리."
"-응? 야,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마. 장난이라니까."

두리가 오공의 어깨를 팡팡 치며 호탕한 웃음을 지었지만 오공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두리는 제가 괜한 말을 꺼내 이상하게 된거라 자책하며 다시 사과하려 입을 벌렸다.

"미안- 읍."

순식간이었다. 오공의 어깨를 붙잡았던 팔이 잡혀 당겨지고 차이났던 시선이 같아졌다. 뜨거운 숨결, 그리고 안에서 꿈틀거리는 말캉한 혀.

쪽쪽거리는 아이들의 뽀뽀가 아닌 혀까지 넣어 입 안을 헤집고 다니는 오공은 매우 집여했고 이내 숨쉬는 타이밍을 놓친 두리가 오공의 어깨를 붙잡으면서 그 시간은 끝났다.

"하아, 하아, 독고오공. 이게, 무슨..."
"나 좋아한다며."
"농담이라고 했잖..."
"나도 너 좋아해. 플라토닉 러브 말고, 에로스 러브."
"뭐? 장난이 지나치잖아, 독고오공!"
"내가 장난으로 보여?"

오공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두리는 그의 눈빛을 보며 잠시 숨을 죽였다가, 한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온달이는 어쩔건데?"
"온달이는- 잠깐, 차두리 너 어떻게-"
"연애 초보도 아니고 멀리 떨어져 있는 타지 사람한테 매일 연락 보내는거 보면 안봐도 딱 아냐? 온달이 성격에 너한테 말했을 거 같은데."

어느새 두리의 눈이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오공은 그 눈빛에서 예전에 잊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고, 미워했던, 욕심.

오공은 그제서야 제가 저지른 짓을 깨달았다. 그렇게 키스를 해버리면 어쩌자는거야, 독고오공. 넌 미쳤어. 완전 멍청이야. 앞으로 두리를 어떻게 봐? 온달이는?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훼집어 놓았다.
온달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독고오공."
"명백하게 내 잘못이야. 정말 미안해, 두리야."

오공은 꿋꿋하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했다. 두리는 그런 오공을 일으켰다. 사실 알고 있었다. 오공이 유독 자신에게만 약하게 군다는 것을. 그것을 이용해 숙제도 베끼고, 변명거리, 핑계거리도 모두 오공을 통해 낸 아이디어였다.

"오공아."
"...."

오공은 두리의 말에 섣불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미쳤다고 그런짓을 해버렸으니, 얼마나 창피한가.
오공은 제 자신이 부끄러워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해, 두리야."
"하... 너 정말, 네가 이렇게 하면 내가 뭐가 되냐."

두리는 그 말을 하고는 오공을 일으켰다.

"미안해... 어?"

순식간에 다가온 두리의 얼굴, 장난스레 휘어져 미소짓고 있는 두 눈과 따뜻한 숨결은, 방금전에 느꼈던 기분과 같다. 입술이 마주치고 혀가 들어와 입 속을 부드럽게 훑고 제것을 빨아올린다. 너무 당황스러워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오공과는 다르게 두리는 눈을 감고 키스에 집중했다.

"두리, 야?"

길었던 입맞춤이 끊어지고 서로에게 얇은 실이 생겼을때, 오공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듯 두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부름에 두리는 항상 지어주던 그 웃음을 지어주었다.

"좋아해, 독고오공."

오공은 구리빛의 제 까만 피부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새빨갛게 변했다고 자신 할 수 있었다.

"농담 아니고, 정말 좋아해."
"...두리야."

나도 좋아해. 정말 좋아해.
하지만-

"온달... 이는...."

두리는 그의 말에 또 웃었다.
오공은 그 웃음의 의미를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두리는 온달에게 sos를 요청한 것을 알았고, 오공이 대학을 대도시에 있는 곳으로 간다고 했을 때 부터 온달에게 지속적으로 연락을 보내며 자취방은 우리집으로 하라, 자신에 대해 칭찬을 해달라, 라는. 어찌보면 아주 간단한 부탁들을 한 것이었지만 눈치빠른 온달이 단숨에 두리의 의도를 꿰뚫어보고는 질투작전이라는 명목하에 두리에게 그렇게 했다고.

"하... 그랬던거였어?"
"깜짝 놀랐지! 난 네가 호모포비아이면 어땠을지 상상도 안가."

두리는 그렇게 말하며 오공의 무릎에 누웠다. 오공은 두리가 자신을 속였음에도 불구하고 화는 나지 않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가 묻고 싶던 것을 물었다.

"두리야,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오공의 급작스러운 질문에 두리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잠시 음, 하고 잠시 앓는 소리를 낸 두리는 말 없이 그냥 웃어보였다. "나도 말해줄게, 알려줘." 오공의 말에 두리가 입을 열었다.

"5년전에, 우리 중2때."
"응응."
"여름방학때 거제도로 놀러왔었잖아... 그 때, 와이랑 더블유 합동 연습할때."
"그때? 그때가 왜?"
"여기까지.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너도 나처럼 말해봐. 응?"

오공은 두리의 말에 뺨을 긁적였다. 이 간질간질한 느낌을 가지기 시작한건 참 오래되었다. 언제였지? 매우, 기억에 남았던. 사소한 오해로 그들과 잠시 틀어졌을 때, 함께 놀러갔을때. 정말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많이 한 추억들.

"얼마전까지 이 느낌에 대해서 몰랐는데, 너를 좋아한다고 자각하니까 기억났어."
"응? 그래서 언제부터인데?"
"10년."
"10년? 야, 그땐 우리..."
"맞아, 10살이었지."
"뭐야, 이녀석. 의외로 순정파였냐? 그런데 난 그런 느낌 전혀 못받았는데. 말이라도 하지."
"그 땐, 단순히 플라토닉이라. 하하, 네 계획이 아주 성공적이야 차두리. 설마 온달이한테 그렇게 시킬줄이야."
"내가 예전부터 잔머리 하나는 끝내줬잖아?"

별 것 아닌 이야기로 한참을 이야기 하던 그들은 하나와 세모, 그리고 리모가 집으로 돌아온 걸 기점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차하나! 같이 들어가자."
"어, 두리. 아, 오공아! 오랜만이야!"
"여, 독고오공. 오랜만이다."
"야, 오공이 되게 많이 컸는데?"

하나가 반갑게 웃었다. 권부자 또한 그를 반갑게 맞았다. 오공은 밝게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는 제 친구들은 이전보다 키도 컸고, 몸도 다부졌다. 하나는 조금 슬림한 편이었지만. 그나저나...

"박사님은 10년전이랑 똑같으시네요."
"아, 그거 칭찬이지? 고맙다. 어서 들어가자. 도운이 기다리겠어."

리모가 앞장서서 집 문을 열었다. 모두가 들어가고, 두리 마저 들어갔다. 오공은 문 앞에 서 그들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뒤를 돌아 하늘을 올려보았다.

"오공! 뭐해? 빨리 들어와."
"응, 알았어 두리야."

마지막 겨울 하늘이 시리도록 맑았다.


-The end.
Posted by Limo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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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훤림]Sponsor

2016. 1. 12.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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