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하늘, 그리고 너

거제도에서 고등학교 졸업까지 한 오공은 대학 문제 때문에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로서는 이미 초등학생 때 부터 해커 일을 하며 짭잘한 용돈을 벌었기 때문에 진로 또한 컴퓨터 계열을 나왔고 진학 또한 거제도에 있는 과학대학교를 다닐 생각이었다.

"대도시로 올라가라."
"아버지, 하지만..."

오공은 10년전보다 훨씬 늙어버린 아버지를 보았다. 거제도에서도 계속 폐차장 일을 하며 그럭저럭 잘 살았다. 하지만 그것도 거제에서의 이야기였다. 대도시는 땅값부터가 비쌌고 그와 마찬가지로 집값또한 비쌌다. 대학이야 장학금을 받으면 되지만, 거주지는 기숙사 학교가 아니거나 자신의 집이 없으면 열약한 환경에서 살아야한다.

컸었던 키도 이제는 점점 줄고 있고, 다부졌던 어깨가 초라해보였다. 오공은 이제 아버지보다 훌쩍 커버린 자신의 키를 보며 대도시에 가서 할 일을 생각해봤다.

"생활비는 걱정 마라. 내가 다 보내줄테니, 알바 할 생각헌들 말고 공부만 해."
"나 대학 안가도 돼요, 아버지. 지금도 오라는데 많아요."
"어허."

오공은 결국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하고 대도시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기로 했다. 온달이는 그럼 여기서 아버지랑 같이 있는건가. 온달이라도 아버지 옆에 있으면 그나마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이제 온달이도 고등학생이니까.

그나저나, 대도시라.

"10년 만이지."

오공은 특별했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기억해냈다. 좋지 않은 일로 엮였다가 더블유까지 받아 또봇의 파일럿을 했던 자신을. 잊으려고 해도 잘 잊혀지지 않는 기억 때문에 오공은 쓴 웃음을 지었다.

물론 더블유도 잘 있었다. 1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오공의 정비로 인해서 매우 깔끔하고 작동도 잘 되었다. 이제 면허도 있고, 직접 더블유를 운전 할 수 있지만 더블유는 하늘을 날아서 가는 것을 더 선호했다.

"더블유, 대도시에 갈거야."
"오, 그게 정말인가-"인가, 인가-

더블유는 자동차였지만 들뜬 것이 확 느껴졌다. 오공은 피식 웃으며 더블유의 아래로 가 정비를 마저했다. 낡은 나사를 빼 내고 새 나사를 끼워 넣은 오공은 이내 쾅쾅거리는 소리에 얼굴을 빼내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온달이다.

온달은 어릴적 아팠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컸다. 고등학생이 되는 시점에서 키가 180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온달은 '형!'하며 달려와 그의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렸다.

"형, 진짜 대도시에 갈꺼야? 나도 데려가면 안돼?"
"응, 대도시로 가게 됐어. 너까지 가면 누가 아버지를 보살펴주냐?"
"힝, 그래도..."

더블유의 아래에서 빠져나와 장갑을 벗고 온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금빛 실이 손에서 사르르 풀어진다.

"언제가는데? 언제? 언제?"
"일주일 뒤에 가기로 했어."
"왜 그렇게 빨리 가는거야."
"집 알아봐야지. 집 찾을때까지는 여관에서 머물거야."
"두리 형네에 전화해보면 안돼?"

아, 그러고 보니...
오공은 현재도 연락을 주고 받는 하나, 두리, 세모, 딩요를 떠올렸다. 화상으로만 보아서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달라지지 않은 얼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온달은 두리의 연락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고,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두리의 얼굴이 보였다.

"두리 형!"
-"오, 온달이~ 어쩐 일이야?"
"헤헤. 형아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
-"그런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나온다. 어? 오공! 오랜만~"
"안녕 두리야."
"있지있지 두리형. 형아가 대도시에서 학교 다니는데 숙소가 필요하대! 형네 집에서 자면 안돼?"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아냐, 두리야. 자취방 구해놨어."

물론 아직 구하지도 않았지만 오랜만에 연락한 이유가 거주 문제 때문이라면 자신이라도 꺼려질 것 같아서 서둘러 방을 구했다고 했다. 온달은 오공의 옆구리를 툭 찌르며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오공이 형 아직 방을 구하지 못했거든. 방 구할때까지만 조금 지내면 안될까? 응, 형?"
-"안될거야 없지. 집에 남는 방 있으니까. 아예 우리집에서 하숙하는건 어때?"
"아냐, 집에 너네만 있는것도 아니고 박사님께서도 있으실텐데, 많이 불편해 하실거야."

오공은 손사레를 쳤지만 두리는 잠시만 있어보라며 아주 크게 아빠를 불렀다. 얼떨결에 차박사가 하숙해도 된다는 허락을 해주었다. 온달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뿌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오공은 그저 불편했다. 마냥 어린이가 아니라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라 친구의 부모님께 기대는 건 아닌것 같았다.

-"야, 우리도 그냥 재워주는거 아니거든? 돈 내야하거든?"
"...그럼 한달만이라도 신세를 져도 될까?"
-"야 물론이지. 대도시에 언제올꺼야?"
"일주일 뒤에..."
-"알았어. 방 싹 치워놓을테니까 몸이랑 짐만 가져 오라고!"
"어, 고마워, 두리야..."
-"친구인데 이정도야 뭐. 일주일 뒤에 보자, 그럼."

통신이 끊어진 전화기를 들고 오공은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온달이 혀를 쯧 차며 더블유에게 기댔다.

"형, 이럴때가 아닐텐데... 짐은 다 싸놨어?"
"어? 어..."

짐이야 다 싸놨다.
온달은 아직까지도 어벙한 표정으로 짐을 더블유에게 실었다. 정말이지 멍청해진 기분이다.
오공은 온달과 함께 집에 들어가서 이미 정리해놓은 짐들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자 보이는 CD케이스에 미소를 지었다.

"어, 형 이건 뭐야?"
"이거 오랜만에 한번 볼까? 10년전에-"

10년 전 갑자기 거제도로 떠나야 했었을 때, 두리가 준 CD였다. 그 안에는 제 친구들과, 박사님들, 네옹과 혜라, 그리고 또봇들이 작별 노래를 불러주는, 지금 보아도 눈물이 날것만 같은 영상이었다.

"이거 두리형이 만든거였지?"
"응? 맞아. 어찌나 잊지 말라고 당부를 하던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한다. CD를 주면서 제가 기획했으니 꼭 간직하라는 간지러운 말. 물론 오공은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웃는 얼굴로 떠났지만 먹먹했던것은 사실이었다.

"두리형 보고싶다."

온달은 유난히도 두리를 잘 따랐다.
어렸을 때 부터 유난히 몸이 약했던 온달은 건강하고, 축구 또한 잘하는 두리를 매우 부러워했었고, 집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발을 헛딛어 넘어지는게 일상이었지만 집에서는 항상 두리형은, 두리형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그러고보니 온달이 넌 유독 두리를 잘 따랐었지."
"헤헤. 사실 형한테만 말하는건데,나 두리형 좋아해."
"...뭐라고?"

오공은 자신이 무언갈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한번 온달에게 재질문을 하였지만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두리형, 멋있잖아. 나도 두리형 같이 되고싶어."

온달이 말하는게 단순한 플라토닉 러브인지, 아니면 에로스 러브인지 헷갈렸다. 그렇다고 자신이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있는건 아니었다. 단지-

'뭐야, 기분이 이상해...'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기분이 더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조금 더 간질간질하고, 조금 더 그를 조여오는 느낌. 머릿속이 핑 돌아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온달은 그런 오공의 상태를 눈치 못채고 게임을 하러 간다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독고온달."

제 동생. 부모님이 바빠 항상 자신이 키우다시피 한 동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거란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오공은 온달에게 자신의 유년 시절을 투자했다.

"차두리."

첫만남이 어디였지? 아, 그래. 초등학교 하교때, 자신이 만든 가짜 또봇때문에 만났었지. 그땐 걔네가 진짜 또봇 파일럿일줄은 몰랐는데. 그러고보니, 디룩도 아크니의 부하였으니까 나도 한때는 아크니의 부하였었겠네.
두리 이메일에 바이러스를 퍼뜨려서 또봇을 조종하기도 했었지.
다시 생각해보니 감회가 새롭다.
뭐, 어떻게 오해를 풀게 되어서 친구가 되고, 더블유도 같이 있고, 모든게 잘됐는데. 괜찮다고 웃어주는 아이에게 마주 웃어주었는데-

왜 너만 부르면 가슴이 먹먹해질까. 10년이나 지났는데.

"보고싶어-"

보고싶어, 두리야.
무서워, 두리야.


***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 대도시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더블유와 둘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방학 동안 대도시에서 지내기로 한 온달도 짐가방을 들고 옆에서 해맑게 웃는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아빠, 2주 뒤에 봐요!"

온달은 해맑게 말하고는 더블유의 뒤에 탑승했다. 온달은 차를 직접 몰고 가려다가, 날아가는게 신호도 없어 더블유를 변신시켰고, 업그레이드된 더블유는 엄청난 속도로 대도시로 향하기 시작했다.

"다들 되게 오랜만에 보는거 같지 않아?"
"그러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얼굴을 대면한 것이 언제였지?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장소와 일시가 같아 만났었었다. 아주 잠시. 두리는 만나지 못했고 세모와 하나, 딩요를 만났었다.

"또봇들도 잘 있겠지?"
"물론이지."

몇차례나 업그레이드 된 더블유는 엄청난 속도로 날고 있었다. 한시간 반쯤 되었을까, 어느새 대도시의 표지판이 나왔고 온달은 그것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

"두리형! 우리 대도시야! 빨리빨리 마중나와줘~"
-"어, 벌써? 알겠어. -야, 미안미안. 오늘만 봐주라. 금방갈게, 온달아. 바로 우리집으로 오면 돼."

모임을 가지고 있던 중이었는지 두리는 사과의 말을 꺼내고는 통신을 끊었다. 오공은 두리의 스케줄을 깬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오니 망설임 없이 바로 온다는 말에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초등학생 시절때에 변두리로 이사를 갔던 차씨 가족과 권씨 가족들은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교육 문제로 다시 대도시에 거주했다.

두리가 보내준 좌표로 길을 찾은지 얼마 되지 않아 아래에서 익숙한 밀빛 머리가 보였다. 두리였다. 두리 뿐 아니라 도운 또한 있었다.

괜시리 민망해지는 기분에 오공은 헛기침을 했으나 들뜬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더블유가 지면에 닿고, 이내 자동차로 돌아와 차에서 내렸다.

"오공아! 온달아!"
"오랜만이야-"

두리의 인삿말에 오공은 기분이 좋아졌다.
유치할지는 모르겠지만 온달의 이름이 앞에 있었으면 만나자마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을 수도 있었기에 오공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리혀엉-!"
"억! 온달이, 너 많이 컸다? 이제 나보다 더 큰거같은데-?"
"헤헤. 형아, 보고싶었어."

유년 시절의 온달은 또래보다 작은 키였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무지막지하게 키가 커서 현재는 두리보다 1-2cm정도 더 큰 편에 속했다. 이제 고등학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 클 여지가 남아있었다.

두리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온달을 진정시키고는 원래 행해야 하는 순서를 알려주었다.

"나한테 이러지 말고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아, 맞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안녕하세요, 박사님."
"그래, 그래. 둘 다 오랜만이구나. 들어가자. 너네가 온다고 해서 맛있는것 자뜩 해놨단다."
"와, 박사님 최고!"

온달은 콧노래를 부르며 도운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공은 짐까지 내버려두고 들어가는 온달을 차마 다시 부를 수 없어서 양손에 짐을 들었다.

"하나는 내가 들게. 그리고 더블유한테 차고 문 열어놨으니까 거기 가 있으라고 해. 엑스랑 와이도 좋아하겠다."
"응, 알았어. 더블유, 뒤편으로 가면 엑스 와이가 있을거야."

더블유가 차고로 들어가고, 오공은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래, 두리의 말만 아니었으면.

"오랜만에 보는건데, 잠시 마당에서 이야기 좀 하다가 들어갈래?"
"-좋아."

무슨 말을 할 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로봇이 나타났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리는 아주 가까운데에서 나고 있었다.

쿵.쿵.쿵.쿵.

오공은 제 심장 부근을 부여잡았다. -어, 뭐지?
난생 처음 느껴보는 두근거림에 오공은 약간의 두려움이 일어났지만, 애써 담담하게 두리와 함께 마당쪽으로 향했다. 마당은 벤치가 있어 휴식공간으로 제격이었다.

"야, 앉자. 뭘 그렇게 서있어? 그나저나 되게 오랜만이다. 한 3년만인가? 하나는 고2때 너 본 적 있다고 하더라."
"응. 수학여행지가 같았으니까. 점호시간이라 오래 보지도 못했지."
"먼저 연락이라도 하지. 너는 내가 먼저 연락 안하면 잘 안하더라?"
"응? 아니, 난 너한테 방해가 될까봐-"

오공의 말에 두리가 시원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씨익 올라가는 양쪽 입고리가 둥그스럼해서 매우 유해보였다. 그는 의자 뒤에 편하게 기대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친구끼리 방해되는게 뭐가 있냐? 얼굴 까먹겠다. 뭐, 이제부턴 같이 살거니까 상관없나?"

친구끼리, 친구끼리.
그래. 친구지. 친구가 어디야. 어디서 이런 친구 얻는건 쉽지 않아 독고 오공. 정신 차려. 애초에 두리는 원래 친구잖아.

"그나저나 온달이 되게 많이 컸더라. 어, 너 키도 완전 많이 컸잖아? 이걸 왜 못봤지? 하아... 누군 축구를 열심히 하는데 아직 키가 180도 안되다니."
"너도 충분히 커."
"너만큼만 딱 컸으면 좋겠다. 나도 아직 성장판이 닫히진 않았겠지?"

운동을 하는 두리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키에 관해서도 민감했고 옆에 앉은 오공을 스캔하더니 한숨을 푹 쉬고는 오공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

두리에게는 별것 아닌 그냥 친구에게 기댄 행동이겠지만, 오공은 쿵쿵 거리는 소리가 두리에게로 전달될까봐 일부러 무겁다며 어깨를 떨쳐냈다. 두리는 오공의 어깨를 그대로 타고 내려와 무릎에 안착했고 곧 의자에 누웠다.

"야 오공아. 나 집에 2월까지만 집에 있고 3월부터는 나가서 살거든?"
"뭐? 왜?"
"아, 얼마전에 국대 상비군 뽑혔어. 올림픽 준비하려구."

그래, 두리는 축구선수가 꿈이었지.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때 축구단에 스카웃이 들어와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이야기는 딩요를 통해 전해들었다. 스포츠 뉴스에는 별로 관심없는 오공은 두리의 활약을 잘 몰랐지만 나름 팬카페도 있는 두리였다.

연한 갈색 눈동자가 하늘을 담는다. 시선이 내려와 제 얼굴을 비춘다. 눈밖에 마주치지 않았는데 무언가 화끈거려 자신도 하늘을 바라보았다. 참 맑았다.

"이거 너한테 제일 처음 말한거야. 사실 상비군 뽑혔다는거 얼마 전에 나도 알았거든. 네가 먼저 알아줬으면 좋겠어서."
"어? 두리야."
"그냥 그렇다고, 오공아."

두리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 놓았다. 오공은 잠시 손을 떨다가 이내 두리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짧은 스포츠 머리를 위로 올렸다. 운동을 하는 아이 치고는 참 말간 피부였다. 간간히 박혀 있는 주근깨는 공통점인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오공아."
"응, 두리야."

두리가 눈을 감은 채 오공의 이름을 불렀다. 언제나 그렇듯이 오공은 부드럽게 대답을 해준다.

"오공아."
"응, 두리야."
"독고오공."
"응, 두리-"
"내가 이렇게 까지 말했는데 모르겠냐?"

-두리야?
번쩍 떠진 눈 사이로 제 얼굴이 모두 비취었다. 약간의 홍조가 올라와 있는 피부는 겨울이기 때문에, 라고 변명을 할 수 있었다.

"나 너 좋아해."
"...응?"
"플라토닉 러브 말고, 에로스 러브. 넌 어떻게 생각해?"
"두리야, 난...."

흔들리는 눈동자, 머뭇거리는 말투.
두리는 그대로 씨익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농담이지.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밥먹으러 가자. 아빠가 엄청 맛있는거 해놨지롱~"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난스럽게 말하는 두리의 모습에 오공은 어이가 없었다. 그의 말에 설레고, 그리고 두리를 좋아한다고 공개까지 한 온달은 어쩐단 말인가. 그에게 대답을 주기에 지금 당장은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농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야, 차두리."
"-응? 야,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마. 장난이라니까."

두리가 오공의 어깨를 팡팡 치며 호탕한 웃음을 지었지만 오공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두리는 제가 괜한 말을 꺼내 이상하게 된거라 자책하며 다시 사과하려 입을 벌렸다.

"미안- 읍."

순식간이었다. 오공의 어깨를 붙잡았던 팔이 잡혀 당겨지고 차이났던 시선이 같아졌다. 뜨거운 숨결, 그리고 안에서 꿈틀거리는 말캉한 혀.

쪽쪽거리는 아이들의 뽀뽀가 아닌 혀까지 넣어 입 안을 헤집고 다니는 오공은 매우 집여했고 이내 숨쉬는 타이밍을 놓친 두리가 오공의 어깨를 붙잡으면서 그 시간은 끝났다.

"하아, 하아, 독고오공. 이게, 무슨..."
"나 좋아한다며."
"농담이라고 했잖..."
"나도 너 좋아해. 플라토닉 러브 말고, 에로스 러브."
"뭐? 장난이 지나치잖아, 독고오공!"
"내가 장난으로 보여?"

오공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두리는 그의 눈빛을 보며 잠시 숨을 죽였다가, 한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온달이는 어쩔건데?"
"온달이는- 잠깐, 차두리 너 어떻게-"
"연애 초보도 아니고 멀리 떨어져 있는 타지 사람한테 매일 연락 보내는거 보면 안봐도 딱 아냐? 온달이 성격에 너한테 말했을 거 같은데."

어느새 두리의 눈이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오공은 그 눈빛에서 예전에 잊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고, 미워했던, 욕심.

오공은 그제서야 제가 저지른 짓을 깨달았다. 그렇게 키스를 해버리면 어쩌자는거야, 독고오공. 넌 미쳤어. 완전 멍청이야. 앞으로 두리를 어떻게 봐? 온달이는?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훼집어 놓았다.
온달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독고오공."
"명백하게 내 잘못이야. 정말 미안해, 두리야."

오공은 꿋꿋하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했다. 두리는 그런 오공을 일으켰다. 사실 알고 있었다. 오공이 유독 자신에게만 약하게 군다는 것을. 그것을 이용해 숙제도 베끼고, 변명거리, 핑계거리도 모두 오공을 통해 낸 아이디어였다.

"오공아."
"...."

오공은 두리의 말에 섣불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미쳤다고 그런짓을 해버렸으니, 얼마나 창피한가.
오공은 제 자신이 부끄러워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해, 두리야."
"하... 너 정말, 네가 이렇게 하면 내가 뭐가 되냐."

두리는 그 말을 하고는 오공을 일으켰다.

"미안해... 어?"

순식간에 다가온 두리의 얼굴, 장난스레 휘어져 미소짓고 있는 두 눈과 따뜻한 숨결은, 방금전에 느꼈던 기분과 같다. 입술이 마주치고 혀가 들어와 입 속을 부드럽게 훑고 제것을 빨아올린다. 너무 당황스러워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오공과는 다르게 두리는 눈을 감고 키스에 집중했다.

"두리, 야?"

길었던 입맞춤이 끊어지고 서로에게 얇은 실이 생겼을때, 오공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듯 두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부름에 두리는 항상 지어주던 그 웃음을 지어주었다.

"좋아해, 독고오공."

오공은 구리빛의 제 까만 피부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새빨갛게 변했다고 자신 할 수 있었다.

"농담 아니고, 정말 좋아해."
"...두리야."

나도 좋아해. 정말 좋아해.
하지만-

"온달... 이는...."

두리는 그의 말에 또 웃었다.
오공은 그 웃음의 의미를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두리는 온달에게 sos를 요청한 것을 알았고, 오공이 대학을 대도시에 있는 곳으로 간다고 했을 때 부터 온달에게 지속적으로 연락을 보내며 자취방은 우리집으로 하라, 자신에 대해 칭찬을 해달라, 라는. 어찌보면 아주 간단한 부탁들을 한 것이었지만 눈치빠른 온달이 단숨에 두리의 의도를 꿰뚫어보고는 질투작전이라는 명목하에 두리에게 그렇게 했다고.

"하... 그랬던거였어?"
"깜짝 놀랐지! 난 네가 호모포비아이면 어땠을지 상상도 안가."

두리는 그렇게 말하며 오공의 무릎에 누웠다. 오공은 두리가 자신을 속였음에도 불구하고 화는 나지 않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가 묻고 싶던 것을 물었다.

"두리야,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오공의 급작스러운 질문에 두리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잠시 음, 하고 잠시 앓는 소리를 낸 두리는 말 없이 그냥 웃어보였다. "나도 말해줄게, 알려줘." 오공의 말에 두리가 입을 열었다.

"5년전에, 우리 중2때."
"응응."
"여름방학때 거제도로 놀러왔었잖아... 그 때, 와이랑 더블유 합동 연습할때."
"그때? 그때가 왜?"
"여기까지.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너도 나처럼 말해봐. 응?"

오공은 두리의 말에 뺨을 긁적였다. 이 간질간질한 느낌을 가지기 시작한건 참 오래되었다. 언제였지? 매우, 기억에 남았던. 사소한 오해로 그들과 잠시 틀어졌을 때, 함께 놀러갔을때. 정말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많이 한 추억들.

"얼마전까지 이 느낌에 대해서 몰랐는데, 너를 좋아한다고 자각하니까 기억났어."
"응? 그래서 언제부터인데?"
"10년."
"10년? 야, 그땐 우리..."
"맞아, 10살이었지."
"뭐야, 이녀석. 의외로 순정파였냐? 그런데 난 그런 느낌 전혀 못받았는데. 말이라도 하지."
"그 땐, 단순히 플라토닉이라. 하하, 네 계획이 아주 성공적이야 차두리. 설마 온달이한테 그렇게 시킬줄이야."
"내가 예전부터 잔머리 하나는 끝내줬잖아?"

별 것 아닌 이야기로 한참을 이야기 하던 그들은 하나와 세모, 그리고 리모가 집으로 돌아온 걸 기점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차하나! 같이 들어가자."
"어, 두리. 아, 오공아! 오랜만이야!"
"여, 독고오공. 오랜만이다."
"야, 오공이 되게 많이 컸는데?"

하나가 반갑게 웃었다. 권부자 또한 그를 반갑게 맞았다. 오공은 밝게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는 제 친구들은 이전보다 키도 컸고, 몸도 다부졌다. 하나는 조금 슬림한 편이었지만. 그나저나...

"박사님은 10년전이랑 똑같으시네요."
"아, 그거 칭찬이지? 고맙다. 어서 들어가자. 도운이 기다리겠어."

리모가 앞장서서 집 문을 열었다. 모두가 들어가고, 두리 마저 들어갔다. 오공은 문 앞에 서 그들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뒤를 돌아 하늘을 올려보았다.

"오공! 뭐해? 빨리 들어와."
"응, 알았어 두리야."

마지막 겨울 하늘이 시리도록 맑았다.


-The end.
Posted by Limo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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